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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봉 한도현 제/1/의/성/장/기


    둘째형님의 ‘동해도요’에서 고려청자에 대해 연구하고 재현에 몰두하고 있을 즈음, 우연히 둘째형님의 소개로 1987년 가을 故 우당 한명성 스승님의 ‘우당청자’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당 선생님은 스승님이면서 같은 한씨 문중의 어르신이신 특별한 인연으로 청녕의 성실성과 타고난 재능이 한씨 문중의 할아버지께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필가 한석벙 문중의 32대손인 청년은 문중으로부터 영예스러온 ‘석봉(石峰)’ 이라는 아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우당 스승님과의 만남은 청년에게 도예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흙과 유약 재료를 다루는 기본기를 터득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당시 ‘장작 가마불의 대가’로 유명한 김현재, 박한영 사형으로부터 장작 가마불 지피는 법을 전수받아 불의 변화에 대해 매료되었다.

    이 때 불의 신비스런 변화에 대한 강렬한 느낌이 현재까지 장작 가마불을 고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우당 스승님의 깊은 신뢰로 ‘우당청자’의 총 책임자로서 물레성형, 정형, 유약, 소성 등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전 과정을 사사받게 되었다.

    이때가 청년의 제1의 성장기로서 고려청자 연구 및 재현에 전념하였던 시기였고, 우당 스승님의 무한한 신뢰와 배려로 일본 북해도에 있는 아리따 마사요와 공동으로 고려청자 연구 및 재현을 위해 노력을 하였으며,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 세계화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우당 스승님의 가르침과 일본 북해도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고려청자를 쉽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란 자만심 때문인지 좀처럼 고려청자 재현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도자기에 대한 생각들이 성숙되었던 시기였으며, 우당 스스님의 그늘을 떠나 홀로서기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꿈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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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봉 한도현 홀/로/서/기


    1989년 "동해도요"를 운영하시던 둘째형님께서 제주도에 "지암요"설립하여 이사를 가시는 바람에 우당 스승님의 문하에서 나와 "동해도요"를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의 아니게 마음속에 담아둔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동해도요"를 홀로 운영하게 되면서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나만의 창작활동과 실험정신이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나의 "장작 가마"를 갖는 것이었다. 이때 큰 형님을 비롯한 우리 오형제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약 6개월 동안의 공사 끝에 끔에 그리던 장작 가마를 작게 되었다. 지금도 그 때의 감격스러움을 생각할 때면 묘한 희열과 열정을 느끼곤 한다. 또한 이때 나는 내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인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심리적인 안정도 찾았다.

    나의 장작 가마를 갖게 되면서 나는 고려청자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으나. 재현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당 스승님의 소개로 김천 영동화학에서 고려청자를 약 1녁간 연구하게 되었다. 그 후 1년간의 각고 끝에 고려청자 재현을 완성하게 되었다. 도공으로서의 길을 걸어오면서 나 자신이 만든 첫 번째 "도자기"였고, 이것이 바로 홀로서기의 상징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고려청자 재현은 도공으로서의 첫 관문이었으며, 정작 내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분청사기, 백자, 진사요변, 다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청자 재현 성공으로 자신감이 충만 되어 분청사기, 천목다완, 이도다완, 덤벙사기, 인화문 등 다양한 도자기 재현을 위해 나의 온 정열과 혼을 불사르며 실험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중에서 분청사기를 1992년 봄에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나의 홀로서기는 나름대로 성취감을 맛보면 일사천리로 잘 가는 듯하였으나, 나의 멈출 줄 모르는 실험정신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시절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 아내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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